'지금 여기', 내면세계를 상징하는 그 언어가 이제는 일상에서도 보편화되었다. 불가의 인연, 기독교의 회개처럼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 물질에서 정신으로 넘어가는 21세기의 여정을 가르키는 나침반 같기도 하다. 지금 여기 본질 왜곡 그러나 일상에서 원용되는 '지금 여기'는 그 본질이 많이 왜곡되어 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시간은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개념상의 편의를 위해 부득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름을 지었지만 내게 실제로 작용하는 시간은 오직 지금 밖에 없다. 10년 전의 나를 추억한다면 그건 지금의 내가 하는 것이다. 10년 뒤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그것 역시 지금의 내가 하는 것이다. 오늘은 개념상으로 판단하면 어제 기준에선 내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살아가는 나는 오늘도 오늘을 살고, 어제도 오늘을 살았고, 내일도 오늘을 살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오늘,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만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를 끝없이 이어붙인 것이 영원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 영원이 된다. 영원한 지금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과 사물, 현상과 현상 사이에 경계를 나누고 이름을 짓다보니 이상한 혼선이나 왜곡까지 뒤따르는 것이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를 도라고 하면 본래의 도가 아니고 이름을 그렇게 하면 본래의 이름이 아니다) 노자 도덕경의 첫 문장도 이렇게 개념에 속아 본질을 놓치지 말라는 경고로 시작하고 있다. 사랑이라 부르면 본래의 사랑이 아니고, 미움이라 부르면 본래의 미움이 아니고, 구원이라 부르면 본래의 구원이 아니고, 해탈이라 부르면 본래의 해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이름짓고 그렇게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